안 쓰는 구독을 못 끊는 이유
쓰지도 않는데, 왜 매달 그대로 빠져나가게 둘까.
카드 명세서를 보다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결제를 발견할 때가 있다.
언제 가입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앱,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몇 달 전인 서비스,
한 번 보고 말았던 영상 구독.
금액이 크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려다가
한 번 더 생각한다.
“이거, 왜 아직도 안 끊었지?”
귀찮아서라고 하기엔 해지 버튼 누르는 데 1분도 안 걸린다.
그런데도 몇 달이 그냥 지나간다.
이게 단순히 게을러서 생기는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가입은 한 번, 해지는 매달 해야 하는 결정
구독은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
시작할 때는 내가 직접 결정한다.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된다.
멈추려면 그때마다 내가 따로 움직여야 한다.
앱을 열고, 메뉴를 찾고, 해지를 누르고, 확인 문구를 읽고.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심리학과 경제학에서는 이런 경향을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부른다.
이미 선택해 둔 것, 이미 진행 중인 것을 바꾸는 건
새로 고르는 것보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구독이 계속되는 건
‘계속 쓰기로 다시 결정해서’가 아니라
‘끊기로 결정한 적이 없어서’일 때가 많다.
“언젠가 쓰겠지”는 생각보다 낙관적이다
가입할 때 우리는 앞으로의 나를 꽤 좋게 예상한다.
‘이번 달부터는 열심히 봐야지.’
‘이 정도 가격이면 자주 쓰면 이득이지.’
이 부분을 잘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미국 헬스클럽 회원들의 기록을 분석한 연구다.
월 정액 회원들은 한 달에 평균 4.3번 정도 갔다.
그런데 같은 곳에서 10회 이용권은 한 번에 10달러였고,
정액제 회원이 낸 돈은 방문 한 번당 17달러가 넘었다.
설문에서 회원들이 예상한 월 방문 횟수는 평균 9.5번,
실제로는 평균 4.17번이었다.
예상의 절반도 가지 않은 셈이다.
더 눈에 띄는 건 해지였다.
월 정액 회원은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평균 2.3개월이 지나서야 계약을 끝냈다.
안 가게 된 것도,
그걸 알아차리는 것도,
그리고 끊는 것도 생각보다 늦다.
쓰지 않는 구독이 남는 건, 앞으로 쓸 거라는 기대가 현실보다 앞서 있어서일 수 있다.
작은 금액일수록 ‘나중에’로 밀리기 쉽다
한 달에 몇천 원, 만 원 안팎이라면
끊는 수고와 아끼는 돈을 저울에 올렸을 때
수고 쪽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번 달만 더 두고 보자’가 반복된다.
다만 이건 연구로 확인된 설명이라기보다
위의 내용들을 이어서 생각해 본 것에 가깝다.
금액이 작을 때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이 글에서 인용한 연구가 직접 다룬 부분은 아니다.
끊기 어렵게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모든 게 내 마음의 문제는 아니다.
온라인 쇼핑 사이트 약 1만 1천 곳을 살펴본 연구에서는
소비자의 선택을 일부러 유도하거나 방해하는 화면 설계,
이른바 다크 패턴(dark patterns)이 1,818건 발견됐다.
연구진은 이를 몰래 추가하기, 긴급함 강조, 방해 같은 일곱 가지 범주로 나눴다.
이 연구가 구독 해지만 다룬 것은 아니다.
다만 서비스를 시작하는 길은 쉽고,
그만두는 길은 찾기 어렵게 느껴졌다면
그건 내 부주의만이 아니라 설계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작게 점검해 보는 방법
그렇다고 구독을 전부 끊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잘 쓰고 있다면 좋은 지출이다.
다만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채 나가는 돈이 있다면
한 번쯤은 직접 결정해 볼 수 있다.
- 지난 한 달 안에 열어봤는지만 먼저 본다.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나중에 따져도 된다.
- 카드 명세서나 앱스토어의 구독 목록에서 이름과 결제일만 적어 본다.
- 선뜻 대답이 안 나오는 것은 ‘다음 결제일 전날’에 알림을 걸어 두고 그때 결정한다.
- 끊었다가 필요하면 다시 가입해도 된다. 해지가 영영 이별은 아니다.
이건 정말 그럴까?
‘구독을 못 끊는 건 귀찮아서일 뿐일까?’
궁금해서 관련 연구를 찾아봤다.
찾아보니 사람들이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기운다는 연구,
정액제를 고른 사람들이 자기 사용량을 과대평가한다는 연구,
선택을 방해하는 화면 설계가 널리 쓰이고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 헬스클럽 연구는 구독 앱이 아니라 오프라인 헬스클럽 회원 자료다. 같은 결과가 요즘의 영상·음악·앱 구독에 그대로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다.
- 현상유지 편향은 구독만이 아니라 여러 선택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 안 써도 ‘있으면 안심이 되는’ 구독처럼, 사용 횟수만으로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구독을 못 끊는 건 이 이유 때문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여러 연구가 가리키는 쪽은
귀찮음 하나보다는 구조와 기대, 습관이 함께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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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ing Not to Go to the Gym (DellaVigna & Malmendier, American Economic Review, 2006)
미국 헬스클럽 회원 자료를 분석해, 월 정액을 선택한 회원이 방문 한 번당 낸 돈이 방문권 가격보다 높았고, 회원들이 자신의 방문 횟수를 실제보다 많이 예상했으며, 마지막 방문 뒤에도 한동안 해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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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Quo Bias in Decision Making (Samuelson & Zeckhauser, Journal of Risk and Uncertainty, 1988)
여러 실험과 실제 선택 자료(건강보험·퇴직연금 선택 등)를 통해, 사람들이 이미 선택해 둔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크게 기운다는 점을 보여준 고전적인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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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Patterns at Scale: Findings from a Crawl of 11K Shopping Websites (Mathur et al., CSCW, 2019)
약 1만 1천 개 쇼핑 사이트의 약 5만 3천 개 상품 페이지에서 다크 패턴 1,818건을 찾아 15개 유형, 7개 범주로 정리한 연구다. 구독 해지만을 다룬 연구는 아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
안 쓰는 구독이 남아 있다고 해서 내가 유난히 허술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되는 구조 안에서,
앞으로의 나를 조금 낙관적으로 예상했던 것뿐일 수 있다.
그러니 결제 알림을 보면
‘왜 아직도 안 끊었지?’
라고 자신을 탓하기보다
‘이건 내가 지금 다시 골라도 선택할까?’
라고 한번 물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