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화가 났는데
괜찮은 척하게 될까?
분명히 기분이 상했다.
약속에 늦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고,
내 말은 중간에 잘렸고,
내가 한 일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아, 괜찮아요."
얼굴은 웃고 있고, 목소리는 평소와 같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지.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화가 났는데도
괜찮은 척을 하게 되는 걸까.
괜찮은 척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화를 얼굴에서 지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든다.
표정을 붙잡아야 하고,
목소리를 고르게 유지해야 하고,
하려던 말을 삼켜야 한다.
그 자리에서 화를 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바쁜 상태일 수 있다.
그러니까 괜찮은 척은
감정이 없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이 있는데도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에는 이유가 있다.
화를 내면 잃을 것이 먼저 보인다
화가 난 순간,
머릿속에서는 빠른 계산이 일어난다.
'여기서 말하면 분위기가 깨질 텐데.'
'저 사람과는 계속 봐야 하는데.'
'내가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화를 표현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먼저 떠오른다.
관계, 분위기, 평판, 다음에 볼 얼굴.
그래서 화는 그대로 두고
얼굴만 바꾸는 쪽을 택하게 된다.
이건 이상한 선택이 아니다.
모든 화를 그 자리에서 내보내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도 편한 일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 선택이
매번, 자동으로 일어날 때다.
얼굴에서 지운 화는 어디로 갈까
괜찮은 척을 하면
겉으로는 화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안쪽에서는 다르다.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몸은 긴장한 채로 남아 있고,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표현을 막은 것이지
감정을 없앤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괜찮은 척은 화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화를 옮겨 두는 일에 가깝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화는
몸에 남거나,
혼자 있는 시간에 다시 올라오거나,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는 조용했는데
집에 와서 문을 세게 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다고 말할수록 상대는 모른다
괜찮은 척에는 또 하나의 비용이 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상대는 정말 괜찮은 줄 안다.
그래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
약속에 또 늦고,
말은 또 잘리고,
내 일은 또 다른 이름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화는 더 쌓이고
괜찮은 척은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느 날
작은 일에 크게 터진다.
상대는 놀란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니었는데,
내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을 뿐인데.
괜찮은 척은 그 자리를 편하게 만들지만
다음 자리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참는 것과 터뜨리는 것 사이
그렇다면 화가 날 때마다
그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화를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관계를 좋게 만들지는 않는다.
문제는 화를 참느냐 내느냐가 아니라
화가 났다는 사실을
나조차 모르는 척하느냐에 있다.
얼굴에서는 지우더라도
안에서는 알고 있을 수 있다.
'나 지금 화났다.'
'이건 넘어가고 싶지 않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화는 조금 다른 것이 된다.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아도
나중에 말할 수 있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것도 내가 정한 것이 된다.
괜찮은 척과 괜찮기로 한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이건 정말 그럴까?
'감정을 겉으로 안 내면 정말 몸에 남을까?'
궁금해서 관련 연구를 찾아보았다.
1993년 실험에서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한 집단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보는 사람이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게 행동하세요."
그 집단은 실제로 표정이 줄었다.
그런데 느끼는 불쾌함은
그냥 본 집단과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교감신경 반응은 더 올라갔다.
겉은 조용해졌는데
안은 더 바빠진 것이다.
2003년 연구에서는
모르는 두 사람이 불편한 주제로 대화하게 했다.
한쪽에게만 감정을 겉으로 내지 말라고 했을 때
대화가 어색해졌고,
상대의 혈압까지 올라갔다.
서로 친해지는 정도도 낮았다.
내가 감정을 지우면
상대도 편해지지 않는다는 결과였다.
2017년 메타분석에서는
43편의 연구를 종합했다.
감정을 겉으로 내지 않는 습관은
낮은 사회적 지지, 낮은 관계 만족과
함께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결과도 있었다.
화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 역시
관계에 좋지 않은 결과와 함께 나타났다.
그러니까 연구가 말하는 것은
'참지 말고 다 말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화는 참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지운 감정이
몸과 관계에 남는 경향은 여러 연구에서 보였다.
그래도 화를 그대로 내보내는 것이
답이라는 결과도 아니었다.
궁금해서 찾아봤고,
찾아보니 괜찮은 척은 화를 없애주지 않았지만
화를 그대로 쏟는 것도 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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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suppression: physiology, self-report, and expressive behavior불쾌한 영상을 보면서 감정을 겉으로 내지 말라고 한 실험이다. 표정은 줄었지만 느끼는 불쾌함은 그대로였고, 교감신경 반응은 오히려 더 올라갔다. 짧은 영상을 본 실험이라서, 일상에서 오래 참는 화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ub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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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al consequences of expressive suppression모르는 두 사람이 불편한 주제로 대화하는 실험이다. 한쪽에게 감정을 겉으로 내지 말라고 하자 대화가 흐트러졌고, 상대의 혈압이 올라갔으며, 두 사람이 친해지는 정도도 낮아졌다. 감정을 지우는 것이 나 혼자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Pub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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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pression and expression of emotion in social and interpersonal outcomes: A meta-analysis43편, 105개 결과를 종합한 메타분석이다. 감정을 겉으로 내지 않는 습관은 나쁜 첫인상, 낮은 사회적 지지, 낮은 관계 만족과 함께 나타났다. 다만 화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관계에 좋지 않은 결과와 함께 나타났다. 함께 나타나는 관계이지, 참는 것이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PubMed)
한 가지 기억할 것
괜찮다고 말했다고 해서
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화를 없앤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음에 또
입에서 "괜찮아요"가 먼저 나온다면,
'나 왜 이렇게 예민하지?'
라고 묻기 전에
'나 지금 정말 괜찮은 건가,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건가?'
라고 한 번 물어봐도 좋을 것 같다.